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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문학 산책


"산책"  김동환


길을 걷는다


*SCBD 보도블록 위로 발소리가 먼저 지나간다

고가 아래에서 살아간다는 말들이

가끔씩 바닥에 닿는다


삼킨 문장들이 속에서 불어난다

배를 채우기 위해 외우던 것들


밤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술잔 바닥에 남은 말들이

길 위로 흩어진다


손이 검은 남자가 뒤에서 따라온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바닥을 쓸어낸다

누군가의 웃음이 그의 얼굴에 걸려 있다


하루는 가볍고

그 가벼움은 자주 무너진다

뭉크의 얼굴이 잠깐 스쳐간다


눈이 내린다

적도에도 눈이 내린다

지워지지 않은 것들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망막의 얇은 층이 벗겨지는 것처럼

빛이 줄어든다


두려움은 옷깃 안쪽으로 들어온다

아잔 소리가 길게 남는다


나는 불행하다


*SCBD – 자카르타 최고 중심거리



<시작노트>

 자카르타라는 도시에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살았던 곳 중 위아래의 구분이 가장 확실했던 곳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SCBD의 빌딩 아래로 매연과 소음이 뒤섞인 고가가 지나갑니다


. 화려한 불빛이 닿지 않는 고가 밑바닥에는 매일의 생존을 위해 무거운 말을 삼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타국에서 ‘배를 채우기 위해’ 외우던 이국의 언어들은 마음속에서 소화되지 못한 채 자꾸만 부풀어 올랐습니다.


 밤이 되면 도시는 화려한 야경으로 치장하지만, 그 화려함 이면의 쓸쓸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술 한 잔에 털어내려 했던 고단한 감정들은 결국 길 위로 흩어질 뿐이었습니다. 


깊은 밤, 내 뒤를 따르던 청소부의 검은 손과 그의 얼굴에 걸린 정체 모를 웃음에서 문득 삶의 기괴함과 슬픔을 보았습니다. 뭉크의 절규하는 얼굴처럼, 그 가볍고 위태로운 일상은 언제든 무너질 것만 같았습니다.


 눈이 내리지 않는 적도의 도시 자카르타. 하지만 제 안에는 매일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망막이 벗겨지듯 서서히 빛이 바래가는 풍경 속에서, 이국적인 아잔(이슬람교의 기도 시간 알림) 소리는 지독한 소외감과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불행하다’는 고백은, 그 거대하고 차가운 도시의 수직적인 구조 속에서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겉돌아야 했던 이방인의 가장 솔직한 외마디 비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홍콩은 어떤가요. 그 안의 우리의 삶들은 어떤가요? 나의 하루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기형도 시인의 언어들이 그리워 지는 밤입니다.




시인 김동환

제주 출생.

2024년 서정문학 상반기 신인상 등단

4.3 전국 청소년 문예공모 대상

적도문학상 수상 외

(현) KIS 한국과정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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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6-06-13 10: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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