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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문학 산책] 낯선 11월 - 타이포 화재 참사를 추모하며
  • 기사등록 2026-10-24 09:36:04
  • 기사수정 2026-10-24 09: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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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11월 - 타이포 화재 참사를 추모하며


설익은 바람이

머리끝을 가른다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지”


아직 한 해를 넘기지 않은 네 목소리가

링거줄을 따라 뚝뚝

혈관에 떨어진다


눈송이 하나 날리지 않는 타이포의 거리

그날, 하늘을 채우던 하얀 연기는

무엇이었을까


흩날리는 붉은 잎 아래

가라앉던 숨소리가

흔적처럼 남고


태우지 못한 지전 곁으로

봄바람이 지나간다


허공에 흩어진 재

커피 향이 마른 자리


여름은 푸른데

열기는 차갑다


낯선 11월을 펼치기 전,

열매 하나 맺을 수 있을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네 사진 앞에 놓고




〈시작 노트〉

11월의 페이지를 펼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첫 문장을 쓰려니 손끝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달은 달력 위에 적힌 숫자에 불과하지만, 어떤 달은 차마 넘기지 못하는 한 장의 페이지로 남기도 합니다. 나에게 11월은 그렇게 조금 낯설고, 오래 바라보게 되는 달이 되었습니다.


홍콩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핸드폰으로 무수한 메시지가 쏟아졌습니다.


큰불이 났다는데 괜찮으냐고, 다친 곳은 없느냐고, 홍콩은 원래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냐고. 걱정과 놀라움이 뒤섞인 물음들이 화면 위로 쉼 없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나는 그 질문들에 답하면서도,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불길이 삼킨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누군가의 평범한 하루와 돌아갈 집, 함께 밥을 먹기로 한 약속과 내일을 기다리던 마음까지, 그날의 불은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갔을 것입니다.


멀리서 전해지는 소식은 때로 한 장의 화면 안에 갇히곤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화면 밖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있고, 한순간에 멈춰 버린 시간들이 있으며, 남겨진 사람들이 끝내 다 말하지 못할 슬픔이 있습니다. 그곳이 내가 살아가는 도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 참사는 더 이상 낯선 곳에서 일어난 불행만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걷던 거리와 스쳐 지나던 창문들, 무심히 올려다보던 건물들 사이에도 누군가의 삶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 삶이 얼마나 쉽게 우리의 곁에서 사라질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조금씩 서늘해지는 요즘입니다. 계절이 바뀌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싶지만,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 남은 슬픔이 바람의 온도마저 다르게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문득 누군가의 마지막 숨을 떠올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마음들을 생각합니다. 세상은 다음 계절로 건너가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거리의 카페에서는 여전히 커피 향이 피어오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날의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슬픔을 똑같이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 일어난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서로의 슬픔에 조금씩 마음을 내어 주며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요. 애도란 어쩌면 잊지 않겠다고 크게 약속하는 일보다, 누군가의 이름과 얼굴을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고, 그들이 살아 있었음을 조용히 기억하는 일에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너’는 한 사람의 얼굴이면서, 그날의 불길 속에서 삶을 잃은 모든 이들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아직 한 해를 온전히 살아 보지도 못한 목소리, 끝내 맺지 못한 열매, 사진 앞에 놓인 한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것들은 너무 일찍 멈춰 버린 생에 바치는 작은 마음입니다. 계절은 몇 번이고 바뀌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끝내 도착하지 못한 봄이 있을 것입니다.


슬프게 꽃이 되어 버린 그들을 추모합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의 긴 겨울에도 언젠가는 따뜻한 바람이 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슬픔을 잊지 않는 마음으로, 서로의 곁을 조금 더 오래 지켜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인 김동환

제주 출생.

2024년 서정문학 상반기 신인상 등단

4.3 전국 청소년 문예공모 대상

적도문학상 수상 외

(현) KIS 한국과정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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